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애의 난 (문단 편집) == 기타 == * 이시애의 난은 애초부터 별다른 명분이 없었다. 난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정작 요구 사항은 "[[함길도]] 지방의 관리를 다시 함길도 출신 북방민으로 임명해 달라(즉, 자치를 보장해 달라)"는 정도였다. 명분으로만 본다면 시작부터 진 게임에 가까웠을 수 있다. 비교할 만한 선례로, [[조사의의 난]] 때는 함경도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태조 이성계가 사실상의 지휘관이었고, 그 [[태조(조선)|태조]]와 [[신덕왕후]]의 원수([[1차 왕자의 난]])를 갚자는 명분 때문에 초반의 지지가 상당했다. 이시애의 난은 그만한 명분이 없었다. * 종친 [[구성군]], [[남이]]와는 달리 서얼 출신 일개 갑사였던 [[유자광]]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일반 병사보다 좀 나은 대우를 받는 병사처럼 되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일정한 재산과 신분이 보장되어야 가능했던 고급 병종이었다. 고급 병종이었던 [[갑사(역사)]]는 조선 초기 조선 군사력의 중추였다. * [[유자광]]은 강경한 대책을 주문하는 상소를 올려서 [[세조(조선)|세조]]에게 신망을 샀다. 이후 토벌군과의 연락관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워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유자광은 이 난을 반란이 크게 번진 까닭을 "[[함길도]]에 파견된 수령들이 모두 무인이라, 백성들을 혹사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무인 출신들은 아무래도 승진에 제약을 많이 받고, 특히 삼정승이나 육조판서 같은 자리 혹은 삼사 등에 임용될 수 없기에, 부패에 빠지기 더 쉬웠다. 물론 문관 출신이라고 부패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 문헌상으로 제일 먼저 집향촌 [[양동마을]]에 입향했다고 기록된 인물인 [[손소(조선)|손소]]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 공신 2등에 올라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져 공조참의가 되었다. * 이 난의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어유소는 이후 [[어우동]] 스캔들에 연루되어 정치 생명에 위기를 맞지만 결과적으로 큰 처벌 없이 복직했다. *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장수들은 바로 명군과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협공하기로 하고 이만주의 근거지로 쳐들어가 이만주와 측근들을 토벌했다. 이건 완전 황당하게 벌어진 일인데, [[명나라]]에서 이만주 토벌에 나서려고 하면서 조선에도 도움을 구했다. [[명나라]]와 [[북원]]이 전쟁을 하는 도중 이만주가 요동 공략에 나섰고, 이것이 명나라의 분노를 샀기 때문. 이때 세조는 "이만주는 벌써 튀었을 거다. 굳이 잽싸게 갔다가 이만주를 못 잡으면 명나라에서 '조선군 때문에 못 잡았다!'고 갈굴 테니, 이만주를 잡느라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조선군이 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한 '''이만주는 가족, 측근들과 함께 근거지에 남아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조선의 골칫거리였던 이만주와 그 세력은 모두 조선군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강순이 '이만주를 잡아 죽였는데도 명군이 안 보여서 이만 돌아갈게요.' 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 걸 보면, 끝내 명군은 안 나타난 모양이다.[* 어쨌든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 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전자에 짐(朕)이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정토(征討)하려고 하여 왕으로 하여금 천병(天兵)을 협조하게 하였는데, 이제 왕의 주문(奏文)을 얻어 보고 배신(陪臣)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姜純) 등을 보냈음을 알았다. 강순 등은 군중(軍衆) 1만여 명을 거느리어 압록강(鴨綠江)·발저강(潑猪江) 2강(江)을 건너 올미부(兀彌府)의 제채(諸寨)를 공파(攻破)하고, 역로(逆虜) 이만주(李滿住)·이고납합(李古納哈) 부자(父子) 등을 죽이었으며, 그 부속(部屬)의 두축(頭畜)을 참획(斬獲)하고 그 여사(廬舍)에 쌓아서 모아 놓은 것을 불살라 그들이 약탈한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人口)를 얻게 하고, 배신(陪臣) 이조 참판(吏曹參判)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치니, 이미 왕이 가져다 바친 적속(賊屬)은 관례에 따라 인구(人口)를 처치하여 친히 완취(完聚)하게 하여 주었고, 우축(牛畜)은 군둔(軍屯)의 종자로 주었다. 진실로 왕은 대대로 돈독하고 충정(忠貞)함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짐(朕)이 척찰(尺札)로써 왕에게 명하고 왕의 나라의 군중(軍衆)이 해동(海東) 에 향응(響應)하여, 짐의 장수와 군졸이 벼락같이 빠르고 바람같이 몰아, 내외(內外)가 합세(合勢)하여 역로(逆虜)가 와해(瓦解)하였으니, 왕은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짐과 왕은 군신(君臣)이 마음을 한가지로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 문금(白金紋錦)·서양포(西洋布)를 주고, 그 강순(康純)·고태필(高台弼) 등에게도 또한 각각 주어서 그 노고를 정표(旌表)하니, 왕은 그것을 공경하여 받으라. 국왕(國王)에게는 은(銀) 1백 냥(兩), 청여의규심 융금(靑如意葵心絨錦) 1단(段), 백지록수대보상화 융금(柏枝綠壽帶寶相花絨錦) 1단(段), 청련구화 융금(靑蓮球花絨錦) 1단(段), 단반홍전지보상화 융금(丹礬紅纏枝寶相花絨錦) 1단(段),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대홍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大紅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흑록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黑綠紵絲) 2필, 직금흉배기린암골타운 청저사(織金胸背麒麟暗骨朶雲靑紵絲) 2필, 소암화팔보골타운 대홍저사(素暗花八寶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청육운 저사(素靑六雲紵絲) 2필, 소암골타운 대홍저사(素暗骨朶雲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 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2필, 남채견(濫綵絹) 4필, 홍채견(紅綵絹) 8필, 백서양포(白西洋布) 10필(匹)을, 영병관(領兵官)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에게는 각각 은(銀) 20냥(兩), 직금흉배호표 대홍저사(織金胸背虎豹大紅紵絲) 1필, 소앵가록육운 저사(素鷪歌綠六雲紵絲) 1필, 소청육운 저사(素靑六雲紵絲) 1필, 소흑록육운 저사(素黑綠六雲紵絲) 1필, 홍채견(紅綵絹) 3필, 남채견(藍綵絹) 1필(匹)을 준다."라고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상을 후하게 내리는 기록이 있다.] * 불안정했던 조선 초기를 안정화시키는 과정을 보면 미국의 [[남북전쟁]]과 닮은 점이 많다. 또한 그 당시 새로운 최신식 무기들을 대량으로 동원한 것도 비슷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